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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45. <태사공>통훈대부강진현감공휘유묘비문(通訓大夫康津縣監公諱愈墓碑文)衣履藏碑
1. 문헌 목록 〉11. 11世 〉2. <요재공>절사모충재공휘여관행상(節士慕忠齋公諱汝寬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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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미재공휘여충묘갈명(嵋齋公諱汝忠墓碣銘)
미재공휘여충묘갈명(嵋齋公諱汝忠墓碣銘) 甞愛睢陽之役有張許南雷者仗大義討賊終不屈而死國故我錦山即唐之睢陽也當時之爲巡遠雲春者可歷歷數而嵋齋趙公其一也義長力短體魂混多相失獨嵋齋公四尺別托于嵋陽檻後之枕子原得與夫人雙賴編伍有家僮返喪耳嗚呼所擧者同義所殉者同義詎可以窀穸之不同地爲差殊觀也後孫淳奎悼墓闕顯刻謀所以貞珉於炳盖以炳爲妹婿使之承乏也謹按公諱汝忠字明汝趙氏以玉川府院君元吉爲遠祖而子瑛典工判書書雲觀副正我 太宗朝屢徵不就孫龜山承義副尉司正是公五世以上高祖士淳司諫院正言沔川郡守曾祖諱淵泰仁縣監祖彭齡昌城敎授與河西金文正公爲道義交考玉堅箕子殿參奉妣靈光丁氏舍人好仁女公生而穎悟骯骯幼己有成人風事怙恃宗族稱孝隆師長鄉黨稱悌博乎經史而文藝夙就同異姓丈人行皆推先焉尤惓惓於忠義每讀史至忠臣烈傳必慷慨不知日之斜而燭之跋國忌必茹素不以草莽自懈壬辰亂聞 大駕播越慨然掩書而起北向痛哭雪涕曰秉彝之天人所同得敵愾盡節朝野何殊今 至尊蒙塵大社幾屋白衣效忠此其時也乃與族姪德村公挺募鄉義率家衆赴錦山討賊公所斬獲居多高忠烈稱之曰有如此丈夫幾人則夷可攘而國可清云及夫矢盡弓絶仰蒼而嘆曰男兒到此只有一死耳豈可舍熊而取魚忘義逃生受人睡千秋遂與趙文烈公同日殉以勞 贈參奉錄宣務原從勳事載輿覽及淳化邑誌吁公私哀榮盡於此耶公娶昌寧曺氏生三男長光先主簿次光前次光後光先男三省日省皆不仕曾玄不盡述銘曰士而裂裳敵愾盡節是曰義師力拒錦山斬馘居多其事尤奇宣武之錄名姓班班至今榮之兼編輿地己記堂斧安用刻爲 只書强圍大荒落北至月下浣 詩山 許炳 謹撰 미재공휘여충묘갈명(嵋齋公諱汝忠墓碣銘) 일즉 당나라 수양성(睢陽城) 전란에 장순(張巡) 허원(許遠) 뇌만춘(雷萬春)이 대의를 짚고 적을 치다가 마침내 굽히지 않고 나라에 죽은 고로 우리 금산(錦山)은 곧 당나라 수양이었다. 당시의 순, 원, 운, 춘(巡, 遠, 雲, 春)이 된 자를 가히 역력히 새겼고 미재조공이 그 한 사람이었다. 의리는 길고 힘은 적어 체백이 혼합되어 많이 서로 잃어버렸는데도 홀로 미재공 四척을 특별히 아미산 남쪽 함촌뒤 자좌원에 부인과 함께 쌍영한 것은 편대로 있던 가동이 반상한 때문이다. 오홉다. 거사가 의리가 같고 순국이 의리가 같으니 어찌 가히 묘역이 같지 않고 땅이 다름으로서 달리 보겠는가. 후손 순규(淳奎)가 묘소에 현각이 없음을 슬퍼하야 병(炳)에 갈명을 청한 것은 병이 매부기 때문에 하여금 구차하게 이은 것이다. 삼가 안찰하니 공의 휘는 여충(汝忠)이요 자는 명여(明汝)며 조씨인데 옥천부원군 원길(元吉)이 원조로 아들 영(瑛)이 전공판서 서운관부정으로 아조 태종(太宗)이 자주 불러도 나가지 않고 손자 귀산(龜山)은 승의부위사정인데 이는 공의 五세 이상으로 고조 사순(士淳)은 사간원 정언에 면천군수며 증조 휘 연(淵)은 태인현감이고 조 팽령(彭齡)은 창성교수로 하서(河西) 김문정공과 함께 도의로 사귀었으며 고 옥견(玉堅)은 기자전(箕子殿)참봉이며 비는 영광정씨 사인호인의 녀(妣靈光丁氏舍人好仁女)였다. 공이 나면서부터 영민하고 꼬장꼬장하야 어려서 이미 성인의 풍의가 있고 어버이를 섬기매 종족이 효도한다. 칭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존대하니 향당이 공경한다 칭하였다. 경서와 사기에 정박하야 문예가 일찍 진취하니 향당 장노가 다 크게 칭상하고 더욱 충의에 성실하여 매양 사기에 충신 열전을 읽으며 반드시 울분하야 해가 저문 것과 촛불이 탄 것을 알지 못하였다. 국상(國喪)이 나면 반드시 소의소식하며 초야은사라 하여 스스로 게을리 아니하며 임진(壬辰)왜란에 인군의 수레가 파천하였단 말을 듣고 울분하여 책을 덮고 일어나 북향통곡하고 말하되 윤상(倫常)을 잡은 것은 하늘과 사람이 같을진대 적침에 절의를 다한 것이 조야(朝野)가 어찌 다르리오. 이제 성상이 피곤하고 국운이 거의 그쳤으나 백의로 충성을 뽐낼 때는 이때라 하고 이에 족질 덕촌(德村) 공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야 거느리고 금산에 다다라 적을 쳐 베고 얻은 것이 많으니 조문열공(趙文烈公)이 칭찬하되 이와 같은 장부가 몇 사람 있으면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가히 청소하겠다 하였다. 화살이다 하고 활이 끊어지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되 남아가 이에 이르러 다만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어찌 감히 곰발바닥(熊掌)을 버리고 고기를 취하며 의리를 믿고 살기를 도모하야 천추에 사람의 치사를 받겠는가하고 마침내 조문열과 함께 같은 날에 순국하니 공노로서 참봉을 증직하고 선무원종훈에 녹훈하여 일이 이에 지승람과 순화읍지에 등재되었다. 감탄하도다. 공사간 슬퍼하고 영광이 이에 다했는가. 공이 창녕조씨(昌寧曹氏)를 취처하야 三남을 출생하였는데 광선(光先)은 주부요 광전(光前) 광후(光後)며 광선남 삼성(三省) 일성(日省)은 다 벼슬 아니하고 증현은 다 기록 아니한다. 새겨 가로되 소비가 크게 호령하며 적진에서 절의를 다하였다. 士而裂裳敵愾盡節 이에 의로운 군사가 힘써 금산에서 적을 막았네是日義師力拒錦山 벤 귀가 많으니 그 일이 더욱 기특하다. 斬馘居多其事尤奇 선무녹훈한 이름이 아롱아롱宣武之錄名姓班班 지금도 영광스럽고 겸하여 여지에 편집하였다. 至今榮之兼編輿地 이미 곧은 돌에 기록하였으니 어찌 써 각할 것인가. 시산(詩山) 허병(許炳) 근찬(謹撰) 註:곰발바닥:一八진미에 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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